VJ 울린 ‘폐지 할머니’ 기억하시나요?

입력 : 2022.07.09 06:00 | 수정 : 2022.07.11 14:51

    속도 내는 고령화…“노인을 위한 사회 준비해야”
    앙상한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폐지를 들고 고물상을 찾았습니다. 오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은 할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 (폐지를 팔아) 라면이라도 사 가려고 왔다”며 “어제 저녁에는 (먹을 게 없어) 설탕물 한 그릇 타 먹고 견뎠더니 (힘이 없어, 다른 이들이) 억지로 (수레를) 밀어줘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할머니가 폐지를 팔아 번 돈은 고작 2500원이었습니다.
    ‘폐지 할머니’가 건넨 요구르트에 눈물을 터뜨린 다큐멘터리 비디오자키(VJ)(왼쪽 사진)와 돈이 없어 밥대신 설탕물로 끼니를 때웠다는 할머니. /KBS ‘다큐 3일’ 방송화면 캡처
    2008년 방영된 KBS ‘다큐3일’ 프로그램 ‘인생만물상-고물상 72시간’ 속 장면입니다. 아마 기억하시는 분도 많을테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방송 요약본이나 캡처본을 본 분도 많을텐데요. 고령의 나이에도 힘들게 지내는 할머니의 모습에 많은 시청자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더 눈물샘을 자극한 장면은 따로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모습을 촬영하던 VJ가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고 하자 할머니가 요구르트 하나를 건넨 것입니다. 밥 한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하루 벌이가 2500원뿐인 할머니가 챙겨준 요구르트. 이를 찍던 VJ는 결국 눈물을 흘렸습니다. 
    노인 빈곤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긴 이 프로그램은 방영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회자되고 있습니다. 기초연금, 노령연금 등 노인을 위한 지원이 강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노인빈곤은 옛 시절의 회한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노인빈곤율 40%…OECD 평균 14.4% 비교해 높아
    생활 형편이 어려워 교회에서 나눠주는 500원을 받기 위해 여러 곳을 순례하는 노인들의 사연을 담은 뉴스 화면. /유튜브 채널 ‘KBS News’ 캡처
    요즘도 국내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분들이 많습니다. 2020년 OECD 국가 기준 평균 노인빈곤율은 14.4%인데 반해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40%가 넘습니다. 미국 23%, 일본 20.2%, 프랑스 4.4% 등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죠.
    국내 노인 자살률은 더 심각한 수준입니다. OECD 회원국 평균이 18.4명인데 우리나라의 노인 자살률은 53.3명입니다. 질병이나 가족과의 관계 등 노인을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전 세계 공통이라는 걸 고려하면, 국내 노인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데에는 빈곤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5060세대 80% “노후 준비 못해”…40대 33.2% “생활비 벌기위해 70대까지 일할 것”  ?
    혹시 지금의 노인들이 보릿고개라 할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낸 이들이기에, 자식에게 헌신하며 모든 걸 바쳐오느라 노후 준비를 못한 탓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시나요? 오늘날의 노인 빈곤은 세대를 넘어 지금 젊은 세대에게도 닥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신한은행이 2022년 4월 발표한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를 보겠습니다. 2021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국 경제생활자 1만명을 대상으로 이메일 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담은 이 보고서를 보면, 은퇴를 목전에 둔 5060세대 중 80% 이상이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부양가족에게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던 게 이유였습니다.
    또 40대의 57.2%는 정년인 65세 전 은퇴를 예상했지만 생활비 등을 충당하기 위해 58.4%가 65세 이후에도 경제활동을 계속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70세가 넘어서까지 일할 것이라는 응답은 33.2% 수준이었습니다.
    은퇴하면 내가 가진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편안한 노후를 누리고 싶다는 모두의 바람이나 희망과는 거리가 먼 통계네요. 하지만 노인 일자리 문제를 다루는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 등 정부와 민간이 교육시설 학습보조, 공공 행정업무 지원, 시니어 카페, 택배 등의 사업을 운영하며 노인 일자리를 꾸준히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입니다.
    취업 박람회에서 면접을 보는 노인(사진 속 인물은 기사와 관계 없음). /조선 DB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0년도 노인실태조사를 봐도 일하는 노인들의 비율은 이전보다 늘었습니다. 65세 이상 노인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2008년 30%에서 2020년 36.9%로 상승했고, 65~69세의 경제활동 참여율 역시 같은 기간 39.9%에서 55.1%로 높아졌습니다.
    2020년을 기점으로 매년 62만~92만명의 베이비붐 세대가 2028년까지 노인 세대로 진입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벌이와는 별개로 고무적인 상황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노인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가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거니까요.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신노년 세대를 위한 노인 일자리 사업 개편 방안 연구’를 보면 더 그렇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60% 이상이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으며, 80% 이상이 근로 활동이 가능한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 세대에 비해 교육이나 건강 상태가 더 좋은 만큼 이들이 노인 세대로 편입되더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만 받쳐준다면 노인빈곤이나 우울의 문제가 이전보다는 심화되지 않을 거라는 예측이 가능합니다. 여기에 기술 훈련까지 더해진다면 지금보다 더 양질의 노인 일자리가 많아질 수 있겠죠.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영화 ‘인턴’에서 70대 나이에 한 스타트업 회사의 인턴으로 입사했다. /영화 ‘인턴’ 스틸컷
    그런 예가 바로 ‘시니어들의 삼성’이라 불리는 IT 기술업체 ‘에버영코리아’입니다. IT 업체라 젊은 세대가 주축을 이룰 것 같지만 이 회사 직원들의 평균 나이는 64.9세입니다. 직원 280여명 중 대부분은 60~70대입니다. 근속 기간도 짧지 않습니다. 2013년 법인 설립 후 첫 공채에서 뽑힌 30명 중 25명이 아직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년 또한 100세입니다. 사실상 건강에만 문제가 없다면 원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셈입니다.
    시니어 직원들은 처음 회사가 생겼을 때는 네이버가 찍은 지도 거리뷰 사진에서 행인, 차량 번호판 등 민감한 정보를 지우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카페나 블로그, 지식인 등에서 부적절한 광고나 음란물 등을 실시간으로 찾아내 차단하는 일을 합니다. 방송 데이터베이스(DB) 관리 업무도 합니다. 방송 프로그램의 줄거리 등을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로 맞춰 정리하는 업무입니다. 하루 4시간 근무하는 이 회사의 직원들은 월 100만원의 월급을 받습니다.
    차량용 매트와 가죽도어커버 등 자동차 용품을 생산·판매하는 주식회사 아리아도 전체 직원 95명 가운데 26명이 고령자입니다. 이 회사는 2018년 시범적으로 고용한 1948년생 직원이 업무를 잘 처리하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시니어 인력들을 채용했다고 합니다. 미싱 경력자 시니어 직원들에게는 그 노하우를 전수받아 되려 회사가 더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네요.
    박노철 아리아 전무이사는 “2019년 어르신 20명을 채용했는데 이 분들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크지 못했을 것”이라며 “연간 30% 이상씩 매출이 성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력난을 겪는 중소기업에 시니어 인력 채용을 권했습니다.
    젊은 모델들로 바글거려야 할 패션모델계에도 나이 지긋한 시니어가 주인공이 되는 곳이 있습니다. 중년 여성복 SPA 브랜드 몬테밀라노의 패션쇼에는 20대 초반의 젊은 모델이 아닌 45세에서 75세 사이의 시니어 모델이 런웨이에 섭니다. 몬테밀라노는 2018년 10월 패션업체로선 처음으로 전문 모델이 아닌 시니어 모델을 기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서희 몬테밀라노 대표는 “시니어라 해도 20대 전문모델 뺨치는 실력과 열정이 있다”며 “앞으로도 시니어 모델 기용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에서 열린 몬테밀라노 패션쇼에 참석한 시니어 모델들이 셀피를 찍고 있다. /조선 DB
    대한민국은 2024년이면 국내 인구 중 1000만명이 노인인 사회로 접어든다고 합니다. 노인 인구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만큼 노인 일자리 문제는 비단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닌, 젊은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의제입니다.
    노인이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적어 사회적 지원이 많이 필요해진다면 이는 노동 가능인구인 젊은층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삶의 활력소가 없어 병에 걸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 또한 건강보험 재정에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2022년 발표한 ‘노인일자리사업의 사회경제적 효과’ 보고서에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개발원 내부 데이터와 건강보험공단 데이터를 결합해 2020년에는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2021년 사업에 참여한 65세 이상 노인 집단과 2020년과 2021년 모두 참여하지 않은 집단의 연간 보건의료비를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2021년에 새로 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집단의 의료비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70만원이나 더 적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김문정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연구조사센터 부연구위원은 “참여자 1인당 월평균 7만원 정도의 의료비 절감이 발생한 것”이라며 “2021년 기준 83만명의 노인이 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걸로 미뤄 1년간 약 7100억원 정도의 보건의료비 감소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아직 우리나라 노인 일자리의 질이 좋은 수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 일자리 사업의 효과분석’ 자료를 보면 노인 일자리는 가구소득을 월평균 17만원 늘려주고, 노인 스스로도 경제적 상태가 좋다고 인식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준다고 합니다. 고령화 사회를 목전에 둔 지금 양질의 노인 일자리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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