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만에 1650만원 모아 만든 이 책
독자와 작가가 원하면 어떤 책이건 만들어
내는 책마다 1쇄 완판 달성중
앞으로도 계속 나무에 미안할 예정
옛말에 이르기를,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 했다. 그러니 건강 생각하는 사람이 불량식품을 피하듯, 정신이 건전하길 원하는 독자는 자연히 질이 떨어지는 책을 꺼리고 비판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책 팔아 밥숟가락 뜨는 사람 치고 본인 손 거친 서적을 나쁘게 말하는 이는 좀처럼 드물다.
-왜 나무에 미안한가요.
“썩 품위있지 못한 작품도 여과 없이 책에 싣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신이라도 꽃가마 타고픈 심정은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일 텐데, 세간에서 퀄리티 낮다는 소리 듣는 글과 그림을 싣는 데 종이를 쓰니 미안한 거죠.”
“비록 B급 소리 듣는 작품일지라도, 책 발간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는 작품은 대부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얻어 독자들로부터 출간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만화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작가들도 책 만들 욕심을 냈고요. 하지만 이들을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었다 하더군요. 그림이 더럽고 글이 천해서라 합니다.”
아버지 출판사에서 일하던 김 대표는 출판업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한다. 평소 만화를 좋아하던 그는, 사람을 위해 나무에 죄를 짓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저질 소리 듣는 만화를 책으로 만드는 건 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도 독자도 책 나오길 바라는데 이를 외면하는 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그는 출판사 문턱에서 거꾸러진 작가들을 아버지에게 소개하는 대신, 아예 새 출판사를 꾸릴 결심을 했다. “아버지 출판사는 동양고전 전문 출판사입니다. 책 내는 것도 좋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명말 천주교와 유학의 상호작용’, ‘동서양 문명의 과학적 사유’ 펴내던 회사에서 낙서 같은 만화책을 찍어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어차피 ‘아웃사이더’들과 함께하는 회사인지라 이름을 거창하게 지을 생각이 없었다 한다. “출판사 이름으로 ‘쓰레기’나 ‘트래쉬 북스(trash books)’ 등도 물망에 올랐는데, 너무 노골적이어서요. 나무한테 사죄하는 정도가 적당하겠다 싶었죠. 내막을 잘 모르는 분들이 회사명에서 순수와 겸허함이 느껴진다 말씀하셔 좀 당황스러운 때도 있었지만요.”
지난 8월 문을 연 나무야미안해에서 책을 낸 첫 작가는 케로로장재미슴(통칭 김케장)이었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만나 쭉 알고 지내던 작가입니다. 책을 내고 싶어했지만, 좀처럼 뜻을 펴지 못하던 친구였죠. 솔직히 다른 작가들에 비해 그림체가 별볼일없는 수준이라서요.”
책 제작 비용은 텀블벅을 통해 인터넷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았다. 예상 외로 호응이 좋아, 불과 3주 만에 1650만원이 들어왔다 한다. 이 돈으로 만든 ‘김케장 단편선’ 1쇄 1300부는 완판됐고, 이후 찍어낸 2쇄 1000부도 현재까지 600부 정도가 팔려나갔다. 이후 합류한 Heekey(희키) 작가와 닥터펜귄 작가도 크라우드 펀딩 모금에 성공했고, 각자 찍어낸 1쇄 1200~1300부를 모두 팔아치웠다. 이들 외에도 작가 3명이 나무야미안해 출판사를 통해 책을 만들기로 계약을 해 두고 있다.
물론 곤란한 때도 없진 않았다. “어떤 학부모께 전화가 왔던 적이 있어요. 아들이 없는 틈에 책이 배달돼 와서 뜯어봤는데, 내용을 보고 놀랐다고요. 이해도 안 될뿐더러 건전해 보이지도 않는다 하시더군요. 정 꺼려진다면 환불해 드릴 테니 아드님과 상의해 주시라 부탁했더니, 나중에 환불요청을 하셨어요. 책을 사주시는 당사자들이야 내용을 알고 돈을 내는 거니 별문제 없지만, 가끔 가족이나 주변 분들이 저희 출판사 책을 보고 기겁하는 때가 있다 들었습니다.”
다만 오히려 김 대표네 집안에선 별말이 없었다 한다. “아버지께선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책이 나오는 것도 괜찮을 거라 하시더군요. 아무튼 보는 사람이 있는 책이라면 세상에 못 나올 이유는 없다는 거죠. 책이라는 건 이래야 한다고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니니까요.”
◇좋아서 하는 일, 부자 될 생각은 없어
-직원은 얼마나 두고 계신지요.
“기본은 1인 출판사입니다. 다만 책 만드는 동안은 작가가 일손을 보태죠.”
-돈은 얼마나 벌리나요.
“책 하나 만드는 데 3개월 정도 걸리는데, 그 기간에 저와 작가가 그럭저럭 먹고살 생활비 정도는 남습니다.”
-그 정도 뿐이면 생계에 지장은 없나요. 혹시 금수저 아닙니까.
“여기서 낸 책이 아버지 출판사에서 만든 책 웬만한 것보다 더 잘 팔립니다. 아버지나 저나 근근이 먹고 사는 영세 출판업자에요. 어차피 좋아서 하는 일이지, 부자 될 욕심 내는 건 아니니까 딱히 상관은 없어요.”
현재까지 김 대표에게 출판을 청한 이는 대부분이 인터넷 커뮤티니 '디시인사이드' 카툰 연재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작가라 한다. 커뮤니티 내에선 인기를 끌었지만, 세상으로부턴 '하류 문화 종사자' 취급당하며 대우받지 못하던 인물들이다. 닥터펜귄 작가처럼 인터넷 활동조차 거의 없던 이마저도 일부 있다. "제가 보기엔 분명 사람들에게 '먹혀 드는' 콘텐츠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 분들인데, 글과 그림이 거칠다 해서 받아주는 곳이 없는 게 안타까웠어요."
